지속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해법을 모색하다
래디컬 에콜로지
(캐롤린 머천트 지음 | 허남혁 옮김 | 이후 펴냄)
원전사고, 방사능 공포, 잊고 지내려 애썼던 일이 섬뜩한 현실이 되었다. 체르노빌 목걸이를 아시는가? 방사선에 노출된 탓에 갑상선 제거수술을 받은 목의 흉터, 당시 참사에 노출된 수만의 아이들은 내내 호르몬 약을 먹으며 살고 있다. 보이지 않는 방사능의 섬뜩한 손길은 언제라도 다시 나타나 그 후손 들에게까지 더 혹독한 값을 요구할 것이다.
얼마 전만 해도 “검출된 방사성 물질이 극소량이라 안전하다”던 발표는, 1986년 체르노빌의 경험을 토대로 전문가들이 진작 예상 했던 결과를 향해 하루하루 치닫고 있다. 수질오염에서 토양오염 으로 이어지는 온갖 사고는 앞으로 우리들의 몸과 정신을 어떻게 유린할 것인가? 1950년대 구소련에서 가동에 성공했던 원자력발 전은 그러나 청정에너지의 대명사가 되어, 지구상에 현재 443개 원전이 가동 중이고, 62개가 건설 중이다.
‘불의 세례’로 새로운 인간되기
인류의 공멸을 향해 달리는 핵 재앙의 미래, 이 지독한 생태 위기의 시대에 살아남을 길은 더 이상 없는가? 그래도 기회가 남았다고 마지막 결단을 호소하는 저자. 하지만 환경문 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행동보다 앞서는 과제가 있다. 그건 우리의 사고방식, 존재방식을 통째로 바꾸는 일이다. 문화적 관점에서 이는 하나의 혁명과도 다름이 없다. 그래서 저자는 이세 가지 전환의 흐름을 근본생태론, 영성생태론, 사회생태론 이라고 요약한다.
캐롤린 머천트는 이를 ‘불의 세례’라고도 한다. 불의 세례로 우리 눈을 가리고 있던 비늘이 떨어져, 여태 못 보던 실상을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는 체험, 그건 당분간의 계산착오를 수정하는 기계적인 작업이 아니라 종교적인 회심, 즉 전혀 다른 존재로의 거듭남을 뜻한 다. 일부의 수정이 아니라 사고방식과 존재 자체의 파격적인 변화, 여기서 비롯하는 정치적 결단이 바로 이 책의 제목 ‘래 디컬 에콜로지’다.
래디컬 에콜로지의 정치적 실현은 1970년대 유럽과 북미의 반핵운동에서 비롯한 평화운동 세력들이 힘을 규합한 녹색당이 대표적이다. 이들에게 정치는 시민의 일상적 활동을 두루 포괄하는 존재론적 결단이다. 오늘 저녁 부대찌개와 된장찌개 중 무엇을 먹느냐의 결정은 우리 미래가 공멸을 향해 꾸준히 달리느냐 아니면 지속가능한 슬로우 라이프냐 두 가지 중하나를 선택해서 결단하는 중대한 사안이다. 이렇듯 그 출발 부터 녹색당은 소소한 일상에서 수시로 결단을 요구하는 여성들의 활약이며 목소리가 두드러졌다.
가부장제 역사 속에 자연에 대한 지배와 착취는 인종과 계급, 젠더 차원에서 동일한 양상의 폭력적 성향을 띄며, 환경 파괴에 따른 일차적 피해자는 여성과 어린이라는 자각은 ‘에 코-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사유 방식, 존재 양식, 정치적 입장을 확립시켰다. 이 책의 저자 캐롤린 머천트는 특히 17세기 유럽에서 시작해 오늘날 무소부재 맹위를 떨치게 된 근대 과학의 본질을 탐구하며, 그 종합적인 배경과 뿌리를 1979년 《자연의 죽음》이라는 저서에서 설파했다.
가부장제 과학 VS 생태론적 혁명의 요청
1970년대 이후 여성운동의 확산에 영향을 받은 여성과학자 들은, 과학이라는 학문적 전통을 통해 자신들을 억죄던 정서 적인 단절감, 이질감 혹은 소외감의 정체가 근대과학의 곳곳에 찍혀 있는 가부장제의 인장이었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더나아가 우리가 당면한 생태위기의 근원에는 가부장제의 틀에 갇힌 기독교 문화와 거기에 뿌리를 둔 근대과학 및 그 전통에서 유래하는 무지와 오만이 깔려있다는 결론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에른스트 슈마허는 이런 식의 과학을 ‘지혜의 과학’이 아니라 ‘조작의 과학’이라고 부른다. 에코페미니즘은 이제 더 이상 조작의 과학이 아니라 지혜의 과학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이런 주장이 오로지 여성주의라는 자각에서 가능했던 건물론 아니다. 미국에서 1970년대 ‘시민을 위한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기술의 파괴적인 오용과 남용을 감시하고 경계하던 모임도 2002년 활동을 재개하며 유사한 인식을 공유한다.
이들은 인류의 공멸을 부추기는 이른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반기를 들고 나아가 지구문명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다양한 해법을 모색한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제를 극복할 수 있는 궁극적 해답은 낡은 문명, 다시 말해 가부장제에서 유래하는 경직성과 온갖 잔재를 털어내는 일이라고 저자는 믿는다.
내가 춤추지 않으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어머니가 살았던 삶을 되풀이하지 않는 첫 세대로,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든 환경운동 1세대 여성들에게 일상의 변혁은좀 위태롭지만 즐겁고 진지한 새로운 방식의 혁명이었다. 피를 흘리는 혁명이 아니라 즐거움을 노래하고 춤추는 혁명, 원자력발전소의 둥근 지붕이 멀리서 보이는 곳마다 여성의 생명력으로 가부장제의 악령을 몰아내는 축제들이 펼쳐졌다.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부활 방학을 맞는 아이들과 손잡고 행진하며 밤새껏 원전 문제를 토론하고 ‘인간 띠잇기’ 행사로 반핵 ? 평화운동을 벌인 그녀들은 '래디컬 에콜로지'의 춤추는 전사들이었다.
강릉 경포 호숫가 초당에서도 매해 봄이면 4백 년 전 청나 라에 한류를 일으킨 조선의 여류 시인 허난설헌을 기리는 문화제가 열린다. 이번 행사에 참석할 예정인 독일 작가들은 “바로 옆에서 사고가 터졌는데, 괜찮냐?”며 걱정들이다. 그곳 언론에서 보도되는 사건 관련 수치를 언급하며 주변에서 방문을 말린다니, 마음이 무거운 건 당연지사다.
4백여 년 전, 답답한 조선 땅에 여자 몸으로 태어나 옹졸한 남편 만난 게 세 가지 한이라고 탄식했던 허난설헌을 추모하는 이 행사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리는 ‘수요 집회’에 늘 들르는 일본 페미니스트들도 참석할 예정이다. 힘자랑 하는 정치가나 위대한 과학자들 손에 우리의 생존을 맡길 수 없다고 믿는 그녀들은 이 난제의 해법을 찾아 생명을 낳고 기르며 거두던 오래된 지혜를 다시 모은다.
김재희
서강대에서 생물학과 독문학을, 독일 보쿰에서 인지과학과 언어학을 공부했다. 여성/환경운동에 동참하고, 서울예대에서 ‘예술과 과학’ ‘생명의 이해’를 가르 친다. 《신과학 산책》 《깨어나는 여신》 《지구 시인 레이첼 카슨》 등의 책을 썼고, 《파도》 《유전자 언어》 《생명의 느낌》 《아주 작은 차이》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