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알기 전에
정부터 알아야 하지 않나
情이란 무엇인가
(정운현 지음 | 김선규 사진 | 책보세 펴냄)
10년을 살던 중국을 떠나 한국에 들어왔다. 떠나는 것도 우연이듯 돌아오는 것도 우연이었다. 그 우연을 누가 주재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다시 중국에 나갈 마음이 없는가를 묻는다. 사실 그 물음은 맞지 않다.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꼴로 중국을 다니는 만큼 중국은 언제나 내 생활의 근거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말하는 중국으로 ‘간다’는 기준은 가족이 중국으로 이주해서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을 말한다. 그럼 내 대답은 확실하 다. 이제는 한국에 정착할 겁니다.
정은 숨겨두어야 좋은 부정적인 부분일까
이제는 중국이 전혀 불편하지 않다. 사람들도 나를 보면 완전히 중국사람 같다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어떤 때는 중국이더 편한 때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한국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해답을 나는 한 권의 책에서 찾았다. 정운현이 쓴 《情이란 무엇인가》가 바로 그 책이다.
그래도 제법 술도 하지, 중국 문화에 대해서도 제법 알지, 중국말도 하니 나에게도 중국 친구가 없을 리 만무하다. 어지 간한 만남에서는 금방 좋은 관계로 풀어간다. 중국에 관한 책도 많이 집필했으니 그들도 나에게 호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중국에서의 10년과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중국과의 만남에서 가장 아쉬운 게 있다. 바로 그게 정운현이 말하는 ‘정’이다. 중국에도 정이란 게 없을 리 없지만 한국처럼 그느낌이 강하지 않다. 오랜 왕조를 거치면서 그런 감정보다는 자신이나 가족의 안녕이 워낙 크게 자리해 우리나라 같은 정은 별로 느껴지지 않은 듯하다.
사실 책에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지만 정(情)은 우리에게 숨겨두면 좋을 부정적인 부분이라는 인식이 상당하다. 혈연, 지연, 학연 같은 것도 일종의 정이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폐쇄성을 만들어서 건강한 성장을 저해하고 있는 부분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정의 가장 소중한 부분을 양지로 끌어내어 사람을 성숙으로 가게 하는 소중한 자양분으로 만든다. 사실 “사랑은 무슨 사랑, 정으로 사는 거지” 라는 둥 우리는 너무 일상적으로 쓰지만 정은 정말 잡히지 않는 존재다. 그런데 저자는 정의 실체를 개괄적으로 설명한 후정의 종류를 다섯 가지로 분류해서 쉽게 보여준다. 부부간의 정, 형제간의 정, 남녀간의 정, 친구간의 정, 사물에 대한 정등이 바로 그것이다.
서로를 한 단계 발전시켜주는 정의 의미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큰 감동을 느낀 내용들이 많다.
추사 김정희나 다산 정약용이 아내에게 보낸 글이나 시는 우리에게 울림을 준다. 독자는 이 두 지성의 돈독했던 부부의 정을 알려줘서 새삼 바른 가정이 바른 지성을 만든다는 것을 일깨운다. 이는 당대도 마찬가지여서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 이나 수의학자 우희종 교수의 모습에서도 바른 지식으로 가는 길에는 가정의 소중함이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사실 부부간에 신뢰가 없고, 물신숭배만 있다면 좋은 지성이 나올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형제간의 정도 마찬가지다. 필자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한나무에서 뻗은 우리 일곱 형제들에 대한 정이 깊어가면서 어떤 부귀와 영화보다도 자신을 아껴주는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서른에 한국을 떠났고 돌아온 후에도 여전히 길 위의 삶을 살기에 친구의 정만큼 더 그리운 게 없다. 요즘은 페이스북 같은 공간을 통해 지인들의 삶을 보지만 그래도 만나서 술을 나누는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퇴계나 고봉의 우정을 보면서 서로를 한 단계 발전시켜주는 우정의 의미를 다시금 느낀다. 사실 어릴 적부터 다양한 친구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수많은 변화의 과정에서 그 우정은 변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필자가 앞서 말한 스스로를 낮추는 마음만 있다면 친구처럼 소중한 정도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어려운 형편에 빚을 내어 준 축의금 100만 원 중 1만 원만 받고 나머지를 돌려준 친구의 편지는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를 일상사에서 느낄 수 있게 해서 감동적이다.
사람이 좋고 사람이 귀한 세상으로 가꾸기
마지막은 사물에 대한 정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물건을 만난다. 그런 과정에 정말 정이 들어버린 것들도 많다. 우리 세대라면 가장 익숙한 것이 바로 오랜 동안 쓰던 바늘이 부러진 것을 애처로워하며 쓴 ‘조침문’이라는 글일 것이다. 물론 이 글 역시 바늘에 자신의 삶을 대칭시키는 느낌이 강하지만 사물 역시 정을 만드는 것 중 하나다.
사실 물질문명의 극단으로 가면서 사람들은 사물에 대한 고마움을 잊었다. 때문에 가장 기본적인 사물의 본성까지 바꾸어가는 원자력 발전을 그저 유용한 수단으로만 보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사물의 고유함을 지키지 못하면 사물 역시 반항을 할 수 밖에 없는 게 세상의 이치다.
이 책은 저자의 풍부한 교양을 바탕으로 한국인들 안에 가장 크게 존재한 정을 풀어낸다. 물론 정은 저자의 말처럼 바르게 발전시키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이를 두봉 주교나 헐버트 박사 등 한국을 가슴으로 사랑했던 이들이 증명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세상살이가 어려울수록 따뜻한 인간미를 되찾아야 합니다. 사람이 좋고, 사람이 귀한 그런 세상으로 가꾸어야 합니다. 이 책이 그런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불씨가 되길 기대합니다”라고 적는다.
정의를 이해한다고 사회가 정의롭게 바뀔까
저자는 언론인으로 활동하다가 정부가 바뀔 때 그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뛰쳐나와 자신의 길을 가는 이 시대 중추역할을 하는 지성이다. 몸을 팔아버린 이나 마음을 팔아버린 이가 많은 이 시대에 지천명을 앞둔 필자가 프리랜서 글쟁이로 살아가는 곤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시대에 우리가 가져야 할 소중한 가치를 복구해냈다.
지난해부터 우리 출판계에서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사람들은 정의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면서 그의 강의를 경청한다. 하지만 샌델의 정의를 이해한다고 해서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의 롭게 바뀔지는 의문이다. 차라리 필자는 그 정의를 알기 전에 우리 내면 깊숙이에 자리한 정(情)을 끄집어내어, 깨끗하게 다듬는 게 이 사회가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한다.
그런 생각을 더 넓히기 위해 이미 열 권의 책을 주문했고,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어줄 계획이다.
조창완
<미디어오늘>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부터 10년 동안 중국에서 체류했으며, 《베이징을 알면 중국어가 보인다》 《죽기 전에 꼭가봐야 할 중국 여행지 50》 등 10여 권의 중국 관련서를 펴냈다. 현재 중국전문여행사 알자여행(www.aljatour.com) 운영하면서, 한신대에서 여행·콘텐츠를 가르치고, 한중경제신문 경제부장, 새만금군산경제자유구역청 투자유치담당관 등으로 일하고 있다. blog.naver.com/chogac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