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중립적인 제3의 입장은 없다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
(샌드라 하딩 지음 | 조주현 옮김 | 나남 펴냄)
‘편견에서 벗어나라’는 말들을 한다. 어떻게 해야 편견에서 자유로울까? 어디로도 ‘치우치지 않은 견해’ 즉 객관적인 시각은 과연 어떤 이에게 가능할까? 무소부재, 없는 곳이 없으시니 못보는 것 또한 없으신 전지전능한 신께는 그러한 객관적 시각이 가능하실 수 있겠으나, 딱 두 개의 눈으로 간신히 제 앞가림 이나 하는 인간 입장에서는 그저 자기가 속한 자리에서 자기 편견으로 세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 혹은 도사라 해도 ‘객관적으로’ 본다는 말은 부디 삼가야 한다는 게 《누구의 과학이며, 누구의 지식인가》의 저자 샌드라 하딩의 입장(standpoint)이다.
“더 강도 높은 객관성이 필요하다”
그녀의 입장! 하딩은 말 그대로 탈식민주의 입장에서의 페미니스트 인식론, 다시 말해 ‘입장 이론’을 구축해온 과학철학 자다.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그녀의 편견에 따르면, 근대과학은 ‘서구 가부장제 중산층 계급’의 관심과 가치들을 끊임없이 투영하며 그 틀을 쌓은 것이다. 17~18세기 새로운 패러다임의 과학을 정립하려고 애썼던 이들은 중세에서 이어진 가톨 릭교회와 봉건국가라는 제도에 맞서서 피 터지게 투쟁한 신흥 계급이었다.
하지만 권력이나 특정인의 이해로부터 독립된 채 ‘자연 그자체를 연구 대상으로 삼겠다’는 과도한 열망으로 자연과학의 역사가 치닫다 보니, 정치적인 이해나 가치 따위는 무조건 배제시키는 가운데 이들 역시 맹목 상태가 되었으니, 인간 의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포착하기란 사실상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녀의 입장 혹은 편견에 따르면, 이른바 ‘가치중립적이고 편향적이지 않은 연구’는 어느덧 입지를 보장받아온 과학 공동체가 그들 전통을 수호해온 배타적 방책이기도 했다. 샌드라 하딩은 이제껏 객관적이라고 얘기해온 과학의 한계를 지적했지만, 그렇다고 객관성일랑 아예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었다.
‘가치중립’보다 ‘고유 입장’이 더 객관적
과학은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에는 도덕이나 정치와는 무관한 순수함을 표방하면서 정치적 사안이나 도덕적 사안과는 관련이 없는 듯 몰상식한 짓거리를 일삼다 말썽이라도 나면 그런 일은 ‘윤리위원회’에서 다루시라고 떠넘겨 왔으니”, 앞으 로는 이렇게 허약한 객관성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도 높은 객관성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하딩이 요구하는 ‘더 강한 객관성’은, 인과성의 정밀도를 높이는 미시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기존 지식의 생산자들이 자연스레 배제시킨 이른바 타자들 시선에 마땅한 가치를 부여 함을 뜻한다. 예컨대 자기 입장을 주장할 수 없던 여성들은 결혼 이후의 성적 도발을 이성간의 당연한 성적 교류로 받아 들였으나, ‘여성주의 입장’에서 이는 분명히 강간이라 정의 내린다.
“가난, 곤궁, 고문 같은 사회적 사건들을 가치중립적으로 묘사하는 것은 가치중립적일 수 없다. 이런 현상에 직면했을 때 모든 진술은 찬성 아니면 반대 둘 중 하나가 된다. 즉, 가치중립적인 제3의 입장이란 있을 수 없다. … 말하자면, 관찰자인 독자는 자신의 지적만족을 위해서 다른 이의 고통과 불행을 소비하는 것이다. 어떤 비평가들이 주장하듯 인간에 대한 어떤 절차는 과학적 실험이라 하고 어떤 경우는 고문이라 해야 할지 과학적 방법은 어떤 기준도 제공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러니 과학의 이름으로 가치중립을 주장하기 보다는 자신의 고유 입장과 함께 그에 따른 편견임을 밝히는 쪽이 한결더 엄격하게 객관적인 입장이 되는 것이다.
함께 살펴야 할 ‘타자’들 관점과 입장
여기서 엄격한 객관성과 헐거운 객관성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 혹은 요건은 ‘성찰’에 대한 강도다. 엄격한 성찰을 요구 한다는 얘기는, (예컨대 국제관계의 정책개발이나 산업의 확장 같은) 주제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도 그 문화적인 특수 성을 빈틈없이 살피되, 연구자의 일상과는 상관이 없는 제3 세계 여성이나 어린이처럼 제 목소리 낼 수 없는 ‘타자’들 삶의 관점, 다시 말해 ‘개발’과는 정반대되는 입장의 이론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이렇듯 번거로움이 요구되는 진정한 성찰은 단순하게 도덕 적인 차원의 요청이 아니라 과학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기폭 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하딩의 입장에서 페미니즘은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사심 없고, 보편적인 것으로 행세했던 서구의 남성중심적 부르주아 집단들의 지식추구 실천들보다 훨씬 객관적인 과학을 절실히 필요로 한다.
그런데 여성연구자들은 과학자 집단에서도 변방에 살게 마련이라, 특히 흑인 여성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겪어온 풍부한 경험들을 토대로 통상적인 접근으로는 모호했던 전망들을 한결 확연하게 밝힐 수 있으리라고 그녀는 확신한다. 변방 그리고 중심, 양쪽의 시각을 동시에 익힌 ‘원주민 여성’의 손으로 작성한 연구 결과물은 편향과 왜곡의 정도를 훨씬 완화시키는 귀한 자료가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다문화주의와의 결합’이 공정한 대안
하딩의 작업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남성과학자와의 연대를 마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좋은 과학 또는 나쁜 과학이 있을 뿐”이라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입장과 달리 유럽중심주의 비판의 토대 자체를 ‘여성들의 삶’에 두어야 한다고 믿는 그녀는 남성들에게 먼저 전통적 젠더 관계를 배반할 것을 요구하며 페미니스트 과학을 아직 미완의 이상 으로 남겨놓는다.
그녀에게 페미니스트 과학이란 훨씬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마주하는 방식이며, 바로 이런 점에서 보편적 가치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한 대안으로 ‘다문화주의와의 결합’을 주장하면서 그녀는 무엇보다 타자들의 변방의 삶을 드러내야 새로운 길이 열린다는 소신을 내려놓지 않는다. 그리고 “당신이 믿는 과학, 당신이 믿는 지식이 대체 누구 입장을 대변하느냐”고 다시 묻는다.
김재희
서강대에서 생물학과 독문학을, 독일 보쿰에서 인지과학과 언어학을 공부했다. 여성/환경운동에 동참하고, 서울예대에서 ‘예술과 과학’ ‘생명의 이해’를 가르 친다. 《신과학 산책》 《깨어나는 여신》 《지구 시인 레이첼 카슨》 등의 책을 썼고, 《파도》 《유전자 언어》 《생명의 느낌》 《아주 작은 차이》 등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