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는 인왕을, 글에는 삶을 담다
빛으로 그리는 신인왕제색도
(도진호 사진 | 이갑수 글 | 궁리 펴냄)
“<인왕제색도>는 진경산수화를 완성한 대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1676~1759)이 일흔여섯 살의 고령에 그려낸 거작이다. 화필을 잡은 지 어언 60년, 그야말로 써서 닳아버린 몽당붓이 무덤을 이루었다고 하는 노화가의 원숙기에 작가만의 내밀한 심의(心意)를 더하여 이루어낸 걸작이 바로 <인왕제색도>다.”
많은 독자들이 좋아하는 미술사학자 고 오주석이 남긴 그의 출세작이랄 수 있는 《우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에 실린 <인 왕제색도>에 대한 오주석의 설명이다.
사진으로 모습을 드러낸 인왕산
그런데 이 <인왕제색도>는, 오주석이 《승정원일기》를 뒤지고 미술사학자 최완수의 해석에 기대서 발견한 바에 따르면, 겸재의 60년지기였던 당대 진경시의 거장으로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이병연(李秉淵, 1671~1751)이 이제 막 물안개가 피어올라 개어가는 인왕산처럼 병석에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비장한 마음을 담아 그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지기 이병연은 안타 깝게도 <인왕제색도>가 완성된 며칠 후 죽었다고 한다.
국보 제216호로 가로 138.2㎝, 세로 79.2㎝ 크기인 이 그림의 묘한 매력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직접 인왕산을 보고 그린, 이른바 진경산수화라는 점이다. 이때까지의 산수화 대부분은 중국의 것을 모방하여 그렸었다.
그런데 겸재가 이 그림을 그린 후 260년이 흐른 지금 내 손에는 《빛으로 그리는 신인왕제색도》가 들려 있다.
‘빛’으로 그렸다함은 사진으로 찍었다는 얘기일 터, 그렇다면그 어떤 정밀화, 심지어 극사실화라 하더라도 진경을 담아내 기에 사진만한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그건 예술을 모르는 자의 무지의 소치라는 걸 깨닫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 없으리라.
그렇다고 ‘빛’으로 한 작업을 폄훼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로서, 각기 의미 있는 작업이란 걸 설명하 려다 미숙함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여하튼 이렇게 인왕산은
이 책을 매개로 빛으로 독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낸다.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
이 책에는 인왕산 아래 동네인 통인동에 사는 궁리출판사 다니는 사람 둘이 2009년 10월부터 2010년 10월까지 일주일에세 번씩 찍은 인왕산의 모습이 거의 비슷한 자태로 실려 있다.
거의 비슷한 모습인 것은 촬영 사정상 트라이포드를 사용할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항상 질서정연한 것에 세뇌된 우리의 경직된 사고로 보면 아쉬움이지만 100% 싱크로율을 확보하기 애시 당초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외려 약간의 오차는 미덕이다.
그건 그렇고 정말 감동인 것은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다가 결국 고정적으로 찍을 한 지점을 발견했는데, 그게 글쎄 겸재가 <인왕제색도>를 그릴 때 직접 인왕산을 보던 바로 그 자리, 즉 겸재가 살던 집터란다. 그러고 나서 사진과 <인왕제색도> 의 모습을 비교해보니 거의 비슷하지 않은가.
전체 사진 중 몇 장만 그런대로 상큼함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청명함을 보여줄 뿐 이 책에 실린 사진은 대체로 뿌옇다. 사실난 요즘 선명도가 뛰어난 고화질 텔레비전 같은 사진을 기대 했었다. 그런데 그 기대를 첫 장부터 배반한다. 독자가 첫 대면할 사진은 안개가 뿌옇게 낀 모습을 담고 있다, 정말 ‘빛으로 만나는 신인왕제색도’라는 느낌이 확 들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빛으로 만난 인왕산의 모습은 “비온 뒤 안개가 피어오르는 인상적 순간을 포착하여 그 느낌을 잘 표현” 한 <인왕제색도>와는 달라야 하지 않았을까. 사진의 선명도가 흐릿한 것이 안개 낀 모습을 그렸다는 겸재의 <인왕제색도>를 염두에 둔 설정인지, 아니면 찍는이의 의도 - 내가 잘 모르는 - 가 담긴 것인지, 편집자가 백색이 아닌 미색 종이를 선택하여 인쇄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여하튼 선명했으면 하는 아쉬 움이 짙게 배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줍은 평자의 기호만 탓할 뿐이다.
사실 처음 만나는 사진부터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보면 큰 변화를 느낄 수 없을 만큼의 미세한 변화가 있을 것이다. 이걸 고속촬영한 것을 보여주듯 책을 한꺼번에 쥐고 드르륵 넘기면 사계절 변하는 인왕산의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책에는 사진을 짝수 페이지의 똑같은 자리에 배치하지 않아 그냥 느낌으로만 상상해본다.
품격 있는 일상은 곧 생활 예술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은 이갑수가 쓴 에세이다. 사진과는 거의 다른 이야기들을 조미료 치지 않은 솜씨로 빚어낸 글맛이 일품이다. 난 이 글을 사진과 어우러지는 ‘화제’(畵題)로는더 이상의 것이 없을 만큼 제격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왕산 아래에 살면서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고만 고만 하루를 지내면서 겪는 일상을 담은 이 글은 감칠맛이 제대로 우러나는 글들로 때로는 사진과는 다르게, 때로는 같게 어우러지면서 입가에 배시시 웃음을 머금게 한다.
품격 있는 그의 일상은 곧 생활 예술임을 느끼게 해준다. 곳곳에서 만나는 시구며, 시장 구경이며, 유난히 여러 번 우려먹은 청국장 얘기며, 다 살갑게 와 닿는다. 요즘 젊은이들처럼 무릎을 치며 크게 리액션을 하고 싶지만 책 곳곳에서 일깨우는 나이 - 개인적으로 글쓴이와 난 동갑이다 - 탓에 혼자 즐길 뿐이다.
그렇다. 사실 이 책을 리뷰하면서 내내 머릿속을 맴돌던, 이책을 ‘예술책’으로 분류해도 될까, 하는 의구심은 내가 이 책을다 읽고 난 다음에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이 책이 예술책이 아니면 어떤 책이 예술책이냐!”
그리고 하나 더 덧붙이면, 이 책과 짝을 이루며 인왕산에서 시내로 시선을 돌려 찍고 쓴 서울 풍경 이야기를 담은 《인왕산 일기》를 함께 읽어야 글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조성일
대학에서 역사학을 공부했고,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뜻한 바 있어 그만두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평 전문 웹진 <부꾸>를 창간하여 직접 운영했 다. 이어 잡지 출판을 하면서 계속 출판계 언저리에서 머물다가 신문이나 잡지에 서평을 기고하고 방송에 나가 좋은 책들을 소개하는 등 출판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