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과 역사와 과학을
절묘하게 버무린
버스트 - 인간의 행동 속에 숨겨진 법칙
(A. L. 바라바시 지음 | 강병남·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펴냄)
픽션과 역사와 과학을 절묘하게 결합한 ‘사이언스 팩션’이라 그런지 아주 재미나다. 루마니아계 헝가리인 물리학자 앨버트 라슬로 바라바시(AlbertLaszlo Barabasi, 1967- )는 내전 으로 비화한 16세기 초 십자군 이야기와 새로운 과학적 패러 다임인 휴먼 다이내믹스(Human Dynamics)를 넘나든다. 그런데 바라바시는 내가 생각하던 그런 물리학자가 아니다. 고전물리학자가 다시 나타난 건 물론 아니다. 그가 파고드는 주제는 내가 아는 물리학의 상식적 범주를 벗어난다.
바라바시는 언뜻 인간행동학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관찰을 통해 인간의 행동을 탐구한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와 거리를 둔다. 모리스는 사람의 몸짓에 주목했다.
바라바시의 관심사는 인간의 역학 관계다. “인간 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 패턴의) 규칙성을 드러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언제 어디에서 그런 규칙성이 드러나 는지 알고자 하며, 그러기 위해서 모형들과 이론들을 개발한 다.” 바라바시도 “인간 행동 연구”라는 표현을 쓴다. 그는 인간의 이동성을 연구한다. 인간 행동의 예측 가능성이 그의 주된 관심사다. “미래 위치 예측에는 과거 행적에 대한 접근성이 관건”이다.
인간의 행동을 예측하는 게 가능한 까닭은 삼라만상에 내재한 ‘폭발성(burst)’ 덕분이다. 폭발성을 내 나름으로 해석하면, 그것은 ‘뜸한 만남의 법칙’이라 할 수 있다. 만남이 뜸했던 사람을 한 번 보면 곧 다시 보게 된다는.
‘뜸한 만남의 법칙’ 쯤으로 해석해 본 ‘버스트’
얼마 전, 거의 10년 만에 중학교 동창을 만났다. 한 달 남짓 지나 인천 문학야구장에서 그 친구와 다시 마주쳤다. 그날 경기는 우천으로 취소되었다. “우리들 인생의 매력은 소소한 세부 사항에 있을지 몰라도, 과학의 장기는 결국 일반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을 고찰할 때도, 우리의 목표는 결국 보편적 성질을 밝혀내는 것이다.” 내가 언제 야구장을 찾을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바라바시는 “자신의 뿌리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저자의 이름을 헝가리식으로 올바로 발음하면 ‘얼베르트 라슬로 버러바시’가 된다. 독자들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표지에는 기존에 알려진 대로 영어식으로 표기하였 다.”(앞표지 날개) ‘감사의 말’에는 비영어권 이름이 수두룩하 다. 본문에 나오는 낯선 이름 중에선 단연 ‘죄르지 도저 세케 이’가 인상적이다. 세케이는 ‘불세출의 영웅’은 아니어도 ‘난세의 영웅’은 된다. 그는 16세기 초 트란실바니아에서 꾸려진 십자군 원정대 지휘관이다. 하지만 십자군 원정을 작파하고 내전을 이끌게 된다.
바라바시가 세케이의 숨은 정체를 탐색하는 과정은 흥미진진 하다. 바라바시는 세케이의 과거 행적이 담긴 편지를 2007년 너지세벤의 문서 보관소에서 열람한다. 바라바시는 1507년한 헝가리 귀족이 어느 세클레르 전사에 관해 썼던 라틴어 편지의 후반부를 주의 깊게 읽는다. 트란실바니아 부총독이자 세클레르의 자작 헤데르파여의 레나르드 버를러바시가 “강도 질을 저지른 사람은 다름 아니라 머로시 주 머크펄버 출신의 세클레르 기사 죄르지 도저”였다고 적음으로써, 문자 기록으론 역사상 최초로 죄르지 도저 세케이를 세상에 소개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나르드 버를러바시는 ‘얼베르트 라슬로 버러바시’의 선조다. “레나르드 버를러바시의 손자인 발린트는 세클레르 영토의 심장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에헤드에 땅을 얻었는데, 그곳에서 내 할아버지 얼베르트가 1909년에 태어 났다. 그 무렵, 버를러바시(Barlabasi)라는 이름에서 혀를 꼬이게 만드는 ‘l’이 떨어져 나갔고, 우리 집안의 성은 버러바시 (Barabasi)로 바뀌었다.”
아무튼 세케이는 내전에서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그의 처형 장면은 참으로 끔찍하다. “이후 오랫동안, 죄르지가 숨을 거둔 장소에는 순례자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죄르지 세케이를 경멸할 만한 범죄자로 다뤘 다. “과거의 역사학자들은 지나간 시절을 낭만적으로 그리워 하는 귀족이나 사제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로 들어서면서 역사학자들은 세케이를 있는 그대로 평가하기 시작 한다.
“죄르지 도저 세케이는 이제 무모한 불한당이나 괴물이나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지나치게 큰 꿈을 꾸었던 혁명가로 여겨지기 시작했다. 빈곤한 대중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기존 질서를 바꾸려고 싸웠던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갑자기 그의 입장을 지지하는 소설과 희곡과 시가 홍수처럼 쏟아졌고, 역사책들은 그를 우호적으로 평가하는 방향으로 다시 쓰였다. 그런 글이한 줄 한 줄 쓰일 때마다 그는 점점 더 실제보다 부풀려진 존재가 되었고, 오늘날에는 거의 신화적 존재가 되었다.”
바라바시가 택한 ‘주연’과 ‘조연’ 읽는 재미도
이 책은 주연과 조연이 여럿이다. 비중 있는 조연급인 티모시 에드워드 더럼은 1990년대 초반 아동 성폭행 혐의로 3,220 년 형을 선고받았다. 누명을 쓴 더럼은 혐의가 풀려 5년 만에 석방되었지만, 미국 교도소 내 위계 서열의 맨 밑바닥인 아동 성추행범이었던 그는 동료 죄수들한테 두들겨 맞아 갈비뼈에 금이 가기도 했다. 더럼에게는 결정적인 알리바이가 있었으 나, 배심원단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배심원 한 명이 평균 80% 확률로 진실을 가려낸다고 가정할 때 배심원 12명이 실수할 가능성은 재판 5억 번 중 한 번꼴이다.
영국의 수리기상학자 루이스 프라이 리처드슨(1881-1953) 은 주연급이다. 바라바시는 리처드슨이 남긴 책 두 권을 눈여 겨본다. 우선 《수치 처리에 의한 일기 예측》은 물리학과 수학 만으로 날씨를 예보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리처드슨의 날씨 예측은 매우 부정확했다. 정확도가 높아진 현재의 날씨 예측 기법은 리처드슨의 방법론에 기반하고 있다. 다음은 리처드슨의 《사투의 통계학》에 관련된 바라바시의 주석이다.
“전세계적 평화가 임박했다는 바람이 망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 연구가 있었다. 1400년에서 1999년 사이에 벌어진 분쟁들 중에서 사망자가 32명이 넘는 모든 사건들을 목록화한 연구였다. 가령 1514년의 십자군 사건도, 1995년의 도쿄 신경가스 테러도 포함되었다. 분석 결과, 그 600년 동안 폭력적인 충돌의 수는 줄어드는 경향도, 늘어나는 경향도 없었다. 전쟁의 시기는 무작위적이며, 폭력이 더 줄어들거나 더 늘어 나는 역사적 경향성 같은 것은 없다는 리처드슨의 결론을 지지하는 결과였다.” 그나저나 이 책, 과학책 맞나?
최성일
1967년 인천 부평 출생. 인하대 국문과를 나와 3년간 백수로 지내다 〈출판저널〉 기자로 발탁됨. 일찌거니 프리랜서로 나섬. 지은 책은 《테마가 있는 책읽기》와 《책으로 만나는 사상가들(전4권)》 말고도 두 권 더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