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싼 가격’만 좇는 당신은 ‘저가 노예’
완벽한 가격 CHEAP
(엘렌 레펠 셸 지음 | 정준희 옮김 | 랜덤하우스 펴냄)
휴일 오후 현관문을 나오면서 내가 원래 사려고 했던 물건은 라면 한 봉지와 1리터짜리 우유 한 통이었다. 그런데 가까운 편의점으로 향하던 중 과자와 빵 그리고 주방세제가 필요하다는 전화를 집으로부터 받았다. 그러자 나는 곧장 방향을 틀어 도보로 십여 분쯤 떨어진 대형마트로 발길을 돌린다. 이유는단 하나. 조금이라도 싸게 사고 싶다는 본능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났을 무렵 나는 두 손으로도 부족할 만큼 한 아름 물건을 샀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들인 물건들은 모두 오늘 아니면 살 수 없는 싼 가격의 제품들이었 다. 대형마트를 나서면서 나는 횡재한 기분을 느끼며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도대체 물건값을 얼마나 아낀 거야?’ 하지만 보스턴대학교의 과학저널리즘학 교수이자 유명한 저널리스트인 저자 엘렌 레펠 셸은 책 《완벽한 가격 CHEAP》을 통해 내게 ‘당신은 결코 절약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절약은커녕 오히려 당장 필요하지 않은 상품들을 대형마트의 상술에 속아 대책 없이 사들였을 뿐더러 택시비를 포함해 황금 같은 휴일 시간까지 낭비했다고 지적한다.
어디 그 뿐인가? 나의 충동적 대형마트행은 영세 중소기업의 폐업과 단순 노동자의 퇴직을 도울지도 모른다는 다소 ‘심각한’ 경고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은 이책의 해제를 통해 나의 할인 매장 쇼핑 행태는 ‘착취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까지 지적했다.) 이 책은 ‘할인’에 관한 진실을 집중 탐구한 책으로, 부제는 ‘The cost of discount culture’ 즉, ‘할인 문화가 일으키는 고비용’이라고 되어 있다.
‘할인’ 속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치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역사, 사회학, 마케팅, 심리학, 경제학에 이르는 폭넓은 분야를 통해 ‘싼 가격’이라는 시스템이 소비 자를 어떻게 조종하고 있는지 심도 있게 파헤쳤다. 또한 대형 할인 매장의 불편한 진실과 ‘할인’ 속에 숨겨진 비밀도 자세히 폭로하고 있다.
대형마트들은 서로 경쟁을 하듯 세워졌다. 그리고 그들의 상적 네트워크는 아예 전국을 뒤덮어 버렸다. 그러면서 그들과 경쟁조차 할 수 없는 지역 사회의 재래시장과 소매점들은 머지않아 문을 닫게 됐고, 이는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됐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창조적 파괴’, 즉 구산업구조에서 신산업 구조로의 변화라며 이는 자본주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할인시대의 창조적 파괴는 균형을 잃어 버린 파괴만 있을 뿐이라는 게 저자의 날카로운 지적이다.
소비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위장한 대형 할인점들의 이같은 상술은 제조업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취하는 21세기 할인 시대의 최대 수혜자다. 대형 할인점들은 영세 상인의 설 자리를 빼앗고, 지역 사회에서 부를 앗아가고 있다. 자영업자들을 몰락시켰으며 숙련된 근로자들을 단순 업무나 보는 점원과 계산원으로 대체시켜 버렸다. 또한 대형 할인점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규모의 경제’ 즉, 대량 구매의 ‘횡 포’는 제조업체의 우위를 능가해 버려 생산의 중요성보다 유통과 판매의 중요성을 더욱 가치 있게 인식시켜 놓고 말았다.
소비자들은 이들 거대 괴물이 제공하는 ‘할인’이라는 마법의 단어에 빠져 벗어나질 못한다. 혹여 할인 상품을 구입했다면 몇 푼 아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정작 이보다 중요한 더좋은 제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다양성과 품질, 그리고 구입 하기까지 고민하며 들인 시간에 대한 비용은 과소평가해 버린다. 그리고 지갑은 소비를 통해 이미 텅텅 비었다는 사실을 잊은 채 얼마를 아꼈다고 자랑하며 뿌듯해 한다. 마치 필자가 어느 휴일에 경험했던 것처럼.
어디 그뿐인가? 가격 할인을 통해 절약한(?) 몫만큼 다른 누군가의 몫이 줄어든다는 사실조차 쉽게 잊어 버린다는 점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싼 가격’은 ‘소비자인 우리’에게 이득이될 수 있지만, 노동자인 ‘또 다른 우리’에게는 손실일 수 있음을 잊지 말라고 경고한다.
‘싼 가격’보다 ‘기업 정신’을 사는 것이 더 중요
이에 대한 대책은 뭘까? 당연 없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대형 할인점 ‘웨그먼스’와 ‘코스트코’의 성공 사례를 통해 ‘개인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사회의 필요에 기여한다’는 애덤 스미스의 ‘계몽된 이기주의’가 사회의 순이익을 증대시 킨다는 점을 설명한다.
직원에게 잘해야 고객이 온다는 기업 정신으로 직원을 신뢰 하는 웨그먼스는 이직률이 6퍼센트다. 소비자들 역시 웨그먼 스를 사랑한다. 그 덕에 웨그먼스는 2005년 ‘포춘’이 선정한 ‘일하기 좋은 100대 기업’에서 1위를 차지했다. 반면 월마트 창업자 샘 월튼의 상속자들은 세계 10대 부자에 속한다지만 적은 임금과 적은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대표적 ‘불량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제 기업 철학과 싼 가격,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지는 현명한 소비자가 선택할 몫이 됐다.
저자는 ‘언제나 최저가’를 지향하는 소비 생활은 초라한 생활 방식이 될 거라고 지적한다. 싼 것만을 찾다보면 정체 불명의 재료로 만든 음식을 먹게 되거나, 혹은 노동력을 착취당 하는 제3국의 노동자가 만든 옷을 입거나, 자녀들에게 재료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짝퉁 장난감을 선물하게 될지도 모른 다고 경고한다. 나아가 ‘어디서 더 싸게 살까?’를 걱정하는 ‘저 가의 노예’가 되지 말고, 과연 내게 필요한 물건인지 아닌지를잘 판단해서 살 것인지 말 것인지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소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엘렌 레펠 셸이 이 책에서 보여주는 ‘싼 가격’에 대한 미국 경제의 현실은 우리의 오늘을 닮았고, 내일을 보는 듯하다. ‘알찬 쇼핑’이라며 단순히 싼 가격을 좇는 우리의 소비 생활은 부메 랑이 되어 지역 경제를 무너뜨리고, 나아가 내 가족의 일자리를 빼앗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재삼 일깨우는 것이다. 현명한 소비, 돈을 절약할 수 있는 진짜 소비 생활을 원한다면 일독을 권한다. 돈과 함께 소중한 시간까지 벌게 될 것이다.
김은섭
건국대 부동산학과를 졸업한 뒤 유명 프랜차이즈 관련 기업에서 일하다 현재는 부동산과 주식, 금융 분야에서 전업 투자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지방 행정연수원과 교보문고, 아이파트너즈 등 각종 기업에서 ‘경제경영서 독서법’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경향신문에 ‘책으로 읽는 경제’라는 제목의 칼럼을 쓰고 있으며 파워블로거(blog.daum.net/tobfreeman)로 활동 중이기도. 저서로는《질문을 던져라 책이 답한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