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을 채우며 은밀함까지 엿본다?
명화 속 비밀 이야기
(강지연 지음 | 신인문사 펴냄)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형제들의 일기를 몰래 훔쳐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비밀을 훔쳐보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도 드물다. 훔쳐본다는 것은 관음증의 욕구를 해결 하기 위해서다. 미술관에서 명화를 감상하다 보면 일기를 훔쳐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가가 무슨 생각으로 작품의 주제를 선택했는지, 혹은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처럼 화가는 명화 속에 어떤 비밀을 숨겨 놓았는지 궁금해질 때가 많다.
명화에 대해 우리의 궁금증을 풀어 주고 있는 책이 강지연의 《명화 속 비밀 이야기》이다. 강지연은 ‘명화 속의 비밀’을 살피면서 유럽 미술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전과 역사, 초상화, 그리고 일상을 주제로 선택했다. 그 중에서도 ‘비밀’에 관한 호기심을 유발하는 테마로 ‘목욕하는 여인들’을 택하고 있는데, 사실 유럽 미술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주제가 목욕하는 여인을 그린 작품들이다.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은 시대를 불문하고 관음증을 자극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
강지연은 ‘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린 대표적 작품으로 렘브란트가 그린 ‘다윗왕의 편지를 든 밧세바’를 택해 그림 속에 숨겨진 비밀을 재미있게 풀어 놓고 있다.
성서에 따르면 고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던 다윗왕은 궁전 옥상을 거닐다 목욕 중이던 아름다운 여인 하나를 발견한 다. 그녀에게 반한 다윗왕은 하인을 시켜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아보게 했다. 여인은 자신의 부하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였다.
부하의 아내지만 밧세바에게 욕망을 느낀 다윗왕은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왕궁으로 불러 들여 잠자리를 같이 한다. 그러나 그녀와의 정사는 머지않아 밧세바의 임신으로 들통이 나고 만다. 가장 비밀스럽게 감춰둬야 했던 유부녀와의 간통이, 그것도 부하 아내와의 간통이 만천하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이 사실을 안 다윗왕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가 있던 우리아를 불러 ‘집에 가서 푹 쉬게나’ 하고 말한 다. 우리아가 집에 가면 밧세바와 동침할 것이고, 그러면 밧세바의 뱃속에 있는 아기는 우리아의 자식인 것처럼 속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다윗왕이 짜낸 아이디어는 우리아의 충직 함으로 물거품이 된다. 우리아는 ‘나라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어찌 집에 가서 혼자 편히 쉴 수 있겠습니까’ 하며 왕궁의 문 앞에서 보초병들과 함께 밤을 지새운다. 결국 다윗왕은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죽여 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렇게 우리아가 죽은 후 다윗왕은 미망인이 된 밧세바를 당당하게(?) 아내로 맞게 된다.
‘목욕하는 밧세바’-1654년, 캔버스에 유채, 142X142, 파리 루브르박물관 소장
밧세바의 실제 모델은 연인 관계였던 유모
손에 편지를 들고 있는 밧세바의 모습은 성서에 나오는 대목이 아니 다. 그녀가 정말 어쩔 수 없이 왕의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자리를 한 것인지, 아니면 ‘얼씨구나’ 하고 왕에게 간 것인지 화가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하나 특이한 것은, 밧세바의 몸이 별로 아름답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렘브란트가 그림을 발표하자 많은 비판이 뒤따랐다. 때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르네상스 시대’. 하지만이 그림만큼은 아름다운 여인의 몸이 아니다. 여인의 몸은 지나치게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뱃살이 접혀 울퉁불퉁한 몸은 적나 라할 정도로 많은 결점을 드러내고 있다. 혹시 실존 인물을 그린 건 아닐까? 그렇다. 그림 속의 여인은 렘브란트의 아들 티투스의 유모이던 ‘헨드리케’였다.
‘아내를 여읜 렘브란트와 아들의 유모인 헨드리케 사이에 있었다는 로맨스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나돌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둘의 나이는 스무 살 정도 차이가 났고 당시 렘브란트는 전처의 유산 문제 때문에 정식으로 결혼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여러 그림에 헨드리케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사랑이든 우정이든, 그녀가 화가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설명이다.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밧세바’를 조금 더 깊이 살펴보면, 여인의 누드를 매우 리얼하게 그려내면서도 렘브란트는 여인의 누드보다 심리 묘사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서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렘브란트가 주목한 것은 왕의 은밀한 편지를 받고 갈등을 겪지 않을 여자가 과연 있을 까? 하는 점이었다. 렘브란트는 밧세바의 그 같은 내면적 갈등을 들춰내기 위해 이런 주제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만 일까? 편지를 들고 있는 작품 속 헨드리케의 모습은 사실 램브란트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흥미롭다.
렘브란트의 아내 사스키아는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얻은 병마와 싸우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렘브란트는 한동안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했지만, 마흔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였기에 그는 머지않아 아내와 닮은 헨드리케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이제 고작 19살이던, 가난하고 평범한 집안의 착한 여자 헨드리케와 재혼할 수는 없었다. 아내 사스키아가 세상을 떠나면서 재혼할 경우 유산 상속의 자격이 상실된다는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다.
헨드리케 손의 ‘편지’는 교회 재판소 소환장?
렘브란트는 20대 때부터 네덜란드 화단에서 가장 유명한 초상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그는 그림을 의뢰해 온 인사들의 사회적 지위나 역할을 묘사하기보다 그들의 내면 세계에 초점을 맞춘 작품들을 그리기 시작 하면서 외면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주문은 점점 줄어들어 경제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우아하고 안락한 생활을 지속하기 위해 사치를 버리지는 못했다.
과도한 낭비벽과 자신의 예술적 자부심 때문에 파산한 렘브란트에게 사스키아의 유산은 아주 중요한 생활비가 됐다.
따라서 사스키아가 죽으며 남긴 유언은 램브란트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이 같은 사연으로 결혼에 이르지 못한두 사람의 관계는 곧 사회적 추문을 불러왔고, 결국 두 사람은 교회 재판소의 소환까지 받게 됐다.
교회 재판소로부터 몇 차례 소환을 받은 헨드리케는 당시 사회로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혐의 없음’을 선고 받은 렘브란트와 달리 ‘간음한 것을 고백하고 엄한 처벌을 받으며 참회하라’는 교회 재판소의 선고까지 받는 다. 바로 이 작품은 헨드리케가 교회에서 소환장을 받을 당시에 제작된 것이다. 그러니 그녀의 복잡한 심정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수밖에.
한편 강지연은 이 책 《명화 속 비밀 이야기》에서 바로크시대 플랑드르 최고의 화가였던 루벤스(1577~1640)의 작품 ‘분수대의 밧세바’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면서 같은 주제 지만 렘브란트의 그림과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렘브란트가 표정이 밝지 않은, 목하 고민 중인 밧세바를 표현하고 있다면, 루벤스는 스스로 왕을 유혹하는 여인 밧세바를 표현하고 있어, 두 작품을 비교해 살펴보는 것도 ‘그림 읽기’의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화가 렘브란트는….
1606년 7월 15일 암스테르담에서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레이 던이란 지역에서 방앗간 주인의 아홉째 아들로 태어났다. 라틴어 학교를 나온 뒤 레이던대학에 입학했으나 학교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 그리는 일에만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야콥 판스바넨뷔르흐(Jacob van Swanenburgh) 밑에서 3년간 미술 수업을 받게 했다. 그 뒤 열아홉 살 무렵이던 1625년엔 개인 화실을 열고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던 피테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의 지도를 받으며 미술에 관한 시야를 넓혔다. 이를 계기로 1632 년엔 거처를 암스테르담으로 옮기게 되었고, 그즈음 외과의사조합의 주문으로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를 제작해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알리기 시작했다. 1642년 30대 중반 무렵엔 ‘야경’을 제작 했으나 극히 나쁜 평을 받아 초상화가로서의 명성을 잃었다. 게다가 같은 해에 아내가 죽었고, 이로 인해 실망과 곤궁에 빠지게 되었으나 작품에 대한 열정만은 잃지 않았다. 쉰 살이던 1656년 파산 선고를 받고 유대인 지구에서 가난하게 생활했다. 하지만 이시기에도 좋은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끼니를 굶는 만년의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야경’ 이후 무너진 화가로서의 삶을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그는 1669년 예순두 살의 나이로 암스테르담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주요 작품으로는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년)’, ‘돌다리가 있는 풍경(1637년)’, ‘야경(1642년)’, ‘세 개의 십자가 (1653년)’, ‘밧세바 (1654년)’ 등이 있다.
박희숙
화가. 동덕여대 예술대학 미술학부와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나왔다. 열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는 등 바쁜 작품 활동 중에도 월간조선, 신동아, 월간중앙 등여러 매체에 명화 읽기, 인물 탐구 등 예술과 관련된 다양한 글을 기고하고 있다. 공공도서관에서 그림읽기와 관련된 특강을 통해 독자들과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갖고 있기도. 저서로는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클림트》, 《명화속의 삶과 욕망》, 《화가의 눈으로 읽어낸 명화 속 사랑이야기-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