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로 기록된 흑인노예제도가 1862년 링컨 대통령에 의해 이미 폐지됐지만 1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극심한 인종차별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어 왔다. 차별과 멸시에 기초한 인종간의 분리정책(segregation)은 1960년대까지 존속되어, 남부의 많은 주에서는 이른바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을 통해 학교, 버스, 식당, 화장실에 이르기까지 흑인용과 백인용을 분리하여 사실상 인종차별을 조장했다. 매서운 분리정책의 삭풍 속에서 다중이용시설인 공공도서관도 예외가 아니었다.
1964년, 루이지애나 주의 클린턴에 있는 한 백인 전용 도서관에 다섯 명의 흑인이 들어갔다. 그 중 한 명인 헨리 브라운이 《흑인의 역사(The Story of the Negro)》라는 책을 요구했다. 사서는 책을 빌려줄 수는 있겠지만 흑인 전용의 자동차문고(mobile library)을 통해서만 직접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자 다섯 명의 흑인들은 자리에 앉아 침묵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이 출동해 체포할 것이라 위협했으나 그들은 도서관을 떠나지 않았고, 결국 법정으로 넘겨지게 되었다.
원칙적으로 도서관을 이용하지 못한 흑인들
‘브라운 대 루이지애나(Brown v. Louisiana)’로 명명된이 사건에서 미국의 대법원은 브라운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숱한 진보적 판례를 남긴 것으로 유명한 포타스 대법관은 합리적인 평등(reasonably nondiscriminatory)은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면서 “공공시설에서 분리정책은 합리적이고 무차별적일 때에만 가능하며 헌법상의 권리를 침해 하는 구실로 이용되어서는 안 된다”며 도서관의 분리정책은 이원칙을 위배한 것이라 판결하고, 또한 침묵시위는 도서관 업무나 이용자들을 방해한 행위라 볼 수 없다고 적시했다. 이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미국 내의 모든 유색인들은 원칙적으로 백인들과 동등하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없었다.
다음의 책들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그림책들 이다. 잘 모르고 있었던 미국의 실상을 알 수 있다는 흥미도 있지만, 평등이라는 인간적인 가치와 도서관과 책을 통해 성장해가는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꼭 읽어볼 만한 책들이다.
《리처드 라이트와 도서관 카드》
이 책은 문학을 통해 미국의 흑인문제를 극렬하게 고발한 소설가 리처드 라이트(1908~1960)가 1945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흑인 소년(Black Boy)》의 일부 내용을 각색한 그림책이다. 저자인 윌리엄 밀러는 미국 흑인들의 투쟁, 생활, 문화와 같은 주제를 주로 다루는 작가로, 우리나라에는 흑인민권운동의 기폭제가 된 로사 팍스의 실화를 토대로 쓴 《사라, 버스를 타다》가 번역 출판된 바 있다.
리처드 라이트는 미시시피 주에서 농부인 아버지와 교사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어려서부터 무언가를 읽는 것을 좋아했지만 책값은 너무 비쌌고 1920년대 남부의 도서관은 흑인에게 책을 대출해주지 않았다. 그래서할 수 있는 일이라곤 쓰레기통에 버려진 헌책이나 신문을 주워 읽는 것이 전부였다. 청소년기에 멩켄의 작품을 읽고 작가가될 것을 결심한 그는 남부의 분위기에 혐오를 느껴 당시 많은 흑인들처럼 북부로 이주하기로 결심한다.
17살이 된 리처드는 시카고로 갈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멤피스로 가서 청소부 일자리를 구했다. 힘든 노동의 와중에서도 독서의 욕구를 버릴 수는 없었던 그는 꾀를 내어 백인 동료의 도서관 회원증을 빌려 도서관에 갔다. 왜 본인이 직접 오지 않았느냐는 사서의 추궁에 친구가 바빠서 대신 책을 대출하러 왔다고 둘러대었다. 무사히 도서관으로 들어간 리처드는 방대한 서가로 둘러싸인 실내 광경을 직접 보고 황홀감에 빠졌다.
책을 대출하려고 데스크에 내밀자 사서는 “혹시 당신이 필요한거 아닌가요?” 라고 물었다. 리처드는 “아니요. 나는 글을 읽을 줄도 모릅니다”고 재치 있게 대답했다. 사서는 크게 웃으며 대출해주었고, 리처드는 다른 이용자들의 폭소를 뒤로 한 채 도서관을 빠져 나왔다.
리처드는 이렇게 편법으로 빌린 크레인, 톨스토이, 디킨스의 작품을 밤마다 읽고 또 읽었다. 이때의 독서가 나중에 작가가 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리처드는 북부로 이주한 후에도 인종차별의 실상을 두루 겪으면서 이를 바탕으로 미국내 흑백 인종 차별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토박이 (Native Son)》를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루이스는 학교에서 링컨 대통령의 어린 시절에 관한 에세이를 써오라는 숙제를 받는다. 링컨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는 도서관에 가야 했지만, 1951년의 앨라배마는 흑인에게 도서관이 개방되지 않던 곳이었다. 엄마는 교회 안의 작은 도서관으로 루이스를 데리고 갔다. 그곳의 책들은 기증된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링컨에 관한 책이 없었다. 이처럼 당시에는 흑인이 출입할 수 있는 도서관도 있긴 했다. 하지만 흑인 전용 도서관은 대부분 분관이나 자동차문고였고, 백인 전용 도서관에 비해 시설이 낙후 되고 장서가 빈약하며 개관시간도 짧았다.
낙담한 루이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백인 전용 도서관을 찾았다. 백인들의 시선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데스크에 앉아 있던 사서가 화난 얼굴로 “넌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저기 ‘백인 전용’이란 안내문이 보이지 않니?”라며 퇴실을 종용했 다. 그 순간, 또 다른 사서가 루이스에게 다가가 “집에 가는 편이 좋겠구나”라면서 뒷문으로 루이스를 안내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일 다섯 시에 여기로 와보렴” 하고 속삭였다.
다음 날, 다시 도서관을 찾은 루이스에게 그 친절한 사서는 “무슨 책을 읽고 싶니?”라고 물었다. 루이스는 어린 시절의 링컨에 관한 자료가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함께 서가를 뒤져 칼샌드버그가 쓴 링컨 전기를 찾아 숙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존 루이스(John Lewis . 1940~) 민주당 하원의원의 유년기 경험담을 다룬 그림책이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 등과 함께 흑인민권운동을 주도했던 미국의 대표적인 민권운동가이다. 세월이 한참 흐른 1998년, 루이스의 출입을 제지했던 파이크카운티 공공도서관은 그를 초청하여 소년 루이스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도서관 회원증을 기증하는 행사를 가졌다.
전창호 | 부산여자대학에서 도서관 사서로 일하고 있으며, 같은 대학에서 시간강 사로 문헌정보학을 강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