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온, 그의 극단적 매력에 빠지다
흑암의 빛줄기
(제임스 S. 그로스타인 지음 | 이재훈 옮김 | 한국심리치료연구소 펴냄)
윌프레드 비온은 영국의 정신분석 가로 1897년에 태어나 1979년에 사망 했다. 사람들은 비온을 소위 대상관계 학파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하지만 사실 우리는 비온을 비온학파에 속한다고 말해야 하는지 모른다. 그만큼 창조적이고 독자적이었던 비온의 매력은 그 극단의 모순에 있다.
난해하고 추상적인 언어로 감정적 진실을 파헤쳤다는 것, 지루한 문장을 따라가면 문득 세상과 나 사이의 접점을 만지게 된다는 것, 비문이라고 생각된 문장을 더듬고 수학적 공식과 도표를 손으로 짚으며 따라가면 어느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 ‘생각 해본 적 없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들 (Unthought Known)’ -이는 정신분석가 크리스토퍼 볼라스의 용어이지만 비온의 세계를 적절하게 표현해준다 -의 세계를 깨닫는다.
이 책은 비온에게서 직접 분석을 받고, 그의 이론을 평생에 걸쳐 연구한 그로스타인의 개론서이다. 그로스타 인은 입구를 찾을 수 없는 비온의 난해한 이론을 가능한 모든 방향에서 들여다보며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내 려고 시도한다. 이미 비온 개론서로 조안 시밍턴의 《윌프레드 비온 입문》 이 번역되어 있으나 시밍턴의 책은 간결하고 쉽게 비온의 이론을 풀어주는 대신 그로스타인의 이 혼란스러운 책이 드러내는 감정적 깊이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래서 비온에 관심이 있다면 두 책을 반드시 읽어야 한다. 그리고 이미 번역된 비온의 책 《경험이란 무엇인가》와 《주의와 해석》도 마찬가지다.
비온이 드러낸 감정적 깊이
비온은 물자체 O에 대한 믿음 F(Faith)를 이야기한다. 즉 환자의 본질 혹은 존재의 핵심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O)이 존재하고, 정신분석은 여기에 믿음을 통해 다가가는 과정이 라는 것이다. 이를 풀어보자. 비온은 우선 칸트처럼 분석가도 환자도 결코 O에 다가갈 수 없고, O를 인식할 수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고 주장한 다. 그렇지만 동시에 O가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아니 정확하게 이야 기해서 이 본질(O)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으면 분석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 동시에 만질 수도 닿을 수도 있다고 믿으라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적인 인식만이 환자가 내면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말한다.
이는 이상하게도 먼 길을 돌아 융의 자기 개념과 만난다. 융은 완전한 인격, 통합된 인격을 이야기했다. 그는 우리의 모든 꿈과 증상은 여기로 가는 지도이자 안내판이고, 정신분석은 그 지도를 해독하는 작업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완전성이 존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기제로 그러한 지도가 형성되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융 역시 비온처럼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완전한 자기가 존재함을 믿고, 내 증상이 거기로 가는 길을 암시한다고 믿으라는 것이 다. 물론 융은 물자체에 닿을 수 있다고 말했고, 그런 의미에서 칸트주의자 라고 할 수 있는 비온과는 달랐다. 융은 그러니까 신비주의자였다.
약 2주 전에 아이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치 지금까지 몇달 동안 부모 몰래 열심히 마음속으로 멜로디와 가사를 외우고 음정과 박자를 연습한 것처럼. 손짓 발짓을 하고 뱅글뱅글 돌며 노래하는 아이를 보면서 리듬과 음정에 대한 감각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멜로디와 언어는 어떻게 태어나는지 새삼 다시 한 번 궁금 해졌다. 그리고 문득 이 책이, 비온이 떠오른 것이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일 수 있다. 아이가 내 말을 이해하리라는 믿음으로 우리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말을 건다. 아이가 음악을 즐기리라는 믿음으로 시큰둥하게 빽빽 울기나 하는 아이 에게 음악을 들려준다.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압도하고 초과하는 자극을 통해서 아이는 조금씩 뭔가를 배워나 간다.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말만 하고, 아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단순한 소리만 들려준다면 아이는 발달하지 못한다. 그러니 발달을 위한 자극은 항상 과도하며, 이렇듯 과도한 자극의 근저에는 과학이 아니라 믿음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이해하리라는 믿음, 그리고 아이가 즐기리라는 믿음 이다.
신비의 세계를 향한 평생 탐구
그런 이유로 프랑스의 소아 정신분 석가 프랑수아즈 돌토가 태어난 지 2 주 된 아이에게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걸어야 한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젖을 빨지 않는 갓난아기와 진지하게 눈을 맞추고 말을 걸면서 돌토는 실제로 아이를 변화시켰다고 한다. 그러니 멜라니 클라인이 열 달도 안 된 아기에게 네가 기차를 내던지는 이유는 엄마를 증오해서라고 진지하게 설명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니 유명한 대중 육아 서적 《베이비 위스퍼》의 저자인 트레 이시 호그 간호사가 갓 태어난 아기에 게도 꼭 정식으로 자기소개하고 이름을 꼬박꼬박 불러주는지 모르겠다. 꽃이라 부르면 그가 내게 와서 꽃이 되는 것처럼.
그로스타인의 이 책은 인간의 마음 이라는 신비한 세계에 대한 비온의 평생 탐구를 훌륭하게 요약하고 있다.
비록 조금 어려울지라도 인간 정신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을 읽기가 너무 어려워서 프로 이트부터 읽을 수밖에 없다면 그조차참 반가운 일이다. 그렇게 프로이트, 융, 클라인, 라캉, 위니코트, 비온, 컨버그, 코헛, 볼라스, 아이건을 따라서 정신분석의 역사 100년을 따라간다면 감히 말하건대 그보다 재미있는 공부도 없다.
김건종
정신과 의사. 서울대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신경정신과 수련을 마쳤다. 지독한 책 중독자로 2008년과 2009년에 네이버 책 부문 파워블로 거로 선정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