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근대 문학작품을 읽다보면 세상 참 많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작품이 다루고 있는 주제나 그깊이에서 오늘의 문학과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 당연히, 지금보다 그때의 작품들이 더 치열하고 더 강렬하다. 그들의 작품을 보면 웅혼하다는 느낌이 드는데, 거기에 비해 오늘의 작품은 너무 비쩍 말랐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작가의 이력을 보더라도 너무 다르다. 앙드레 지드가 부르주아의 자손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재산을 청산하고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그리고 나서 작가로서 거듭났다는 것은 의외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조지 오웰도 그렇다. 비록 하급관리의 아들이나 식민지에서 근무했으니, 토박이들보다는 나은 삶을 살았을 터다.
본인은 경찰이 되어 역시 식민지에 왔으니, 더 나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권위와 안락과 안일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삶이었을 터. 그럼에도 오웰은 박차고 나왔다. 아마도 삶의 조건이 안정될수록 자신의 영혼은 질식하고 있다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더 많은 명예와 더 많은 부를 추구하는 오늘의 작가들과 대비한다면 이들의 삶은 더 빛난 다. 문학이라는 것이 신성할 수 있다면, 그것을 빚어내는 사람이 범부들과 다르다는 점도 일조해야 한다. 오늘날, 과연 문학이 신성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세속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한 작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오웰의 작품을 읽다보면 그야말로 진정한 자유인이 아닌가 싶다. 진보적 가치에 열광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스페인 내전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선과 악이 뚜렷이 나뉘어지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악의 심연을 보았을 것이라 일반적으로 추측하기 쉽다. 하지만, 그는 예측을 넘어서 선 속의 악을 까발렸다. 개인적으로 《한낮의 어둠》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치는 《카탈로니아 찬가》가 바로 그것. 정치와 이념의 전선은 늘 뚜렷하다. 그렇지만 선과 악은 나뉘어지기보다 섞여 있게 마련이다. 악 속의 선은 차라리 이해심이나 동정심을 자극한 다. 문제는 선 속의 악에 있다. 가식적이고 역겹고 속았다는 느낌을 주어서 그렇다. 딜레마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악보다는 선이 낫다. 이 말은, 선을 품고 있는 악보다, 악을 숨기고 있는 선이 낫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선이 악을 감추고 있는 것은 흉악하기 짝이 없다.
오웰의 작품은 그런 딜레마적 상황을 인정하고 읽어 나갈 적에 훨씬 흥미롭다. 선뜻 어느 편에 서지 못하고 망설이고 주저하는 가운데 인식의 지평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1984》도 그렇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아무래도 《동물농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분명히 소련체제를 비아냥거리는 풍자소설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일종의 미래소설이라 할 《1984》도 그가 살던 시대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거짓 유토피아로 판명된 소련체제에 대한 절망감이 없었다면 이 작품은 쓰여지지 않았을 듯싶다. 그럼에도 이 작품을 말하자면 일종의 반공소설로만 볼 수 없는 요소도 다분히 많다. 현실을 반영하고 있지만, 자본주 의든 공산주의든 교조성이 강화된 체제일반이 겪을 수밖에 없는 불행한 미래를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미래가 낙관성을 띤 것이 아니라 지극히 암울하다고 보는 것을 디스토피아라 한다. 《1984》는 확실히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다. 빅 브라더로 상징되는 독재체제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철저히 억압하는 사회를 예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품을 읽어나가면서 끝내 떨칠 수 없는 우울함이 이같은 배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가까운 미래가, 우리의 바람과 달리, 개인의 숨통을 조이는 답답한 사회일 거라는 것 자체는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 특히 오웰이이 작품을 쓰던 시기를 감안하면 이해할 만하다. 자본 주의는 공황을 겪은 바 있고, 세계전쟁을 통해 그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다. 진보적 가치를 현실화하리라 기대했던 소련체제는 그 열망을 저버렸다. 미래소설이 란, 오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을 뿐이다. 1948년에 그린 1984년이 잿빛 풍경으로 그려진 것은 당연하기까지 하다.
《1984》를 읽으며 내내 불편하고 답답하고 우울한 이유는 다른 데 있다. 통제사회도 좋고 감시사회도 좋다.
한겨울의 얼음장 밑에도 물은 흐르는 법이다. 어느 체제든 새로운 꿈을 꾸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니 저항하는 부류가 있는 법이다. 근본적이고 사상적인 측면에서 회의하고 저항하는 윈스턴이 여기에 해당한다.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체제에 맞서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감각적이고 육체적이고 쾌락적인 차원에서 이를 억압하고 방해하는 체제에 저항하는 이도 있다. 줄리아가 여기에 든다. 어찌보면 오웰은 억압에 맞서는 두 부류의 대표격으로 두 인물을 빚은지도 모른다. 의당 줄리아로 상징되는 부류의 저항이 오래 가지 못할 것으로 여기게 마련이다. 감각에는 신념이 없는 법이니까. 쾌락은 다른 것으로 얼마든지 보상될수 있는 법이니까. 그렇다면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은 어떨까? 《1984》는 그것도 얼마나 보잘것없느냐고 말한다. 작품의 말미가 이를 보여주니, 다음과 같다.
“그는 그 거대한 얼굴을 쳐다보았다. 대체 어떤 미소가 저 검은 콧수염 속에 감춰져 있는지 알아내는 데 4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 오, 저 사랑이 넘치는 품안을 떠나 고집스럽게 스스로 택했던 유형(流刑)! 술내 나는 두 줄기 눈물이 코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러나 잘 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투쟁도 끝났다. 그는 자신을 이긴 것이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
빅 브라더의 시대는 저항에 대한 잔인한 응징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저항했던 체제를 사랑하도록 만든다. 처벌에 그치지 않고 변절하도록 하는 것이다.
《1984》가 우울한 것은 바로 이 결말에 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소설 속 결말이 그리하여 울적해지는 것이 아니라, 소설이 현실이 되고 있어 암담해지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그래도 오웰이 1948년에 1984년을 내다보았는데, 2016년이 1984년으로 되돌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착시현상이 벌어지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권우
1963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주로 책과 관련한 일을 하다, <출판저널> 편집장을 끝으로 직장 생활을 마감했다. 책만 읽고 싶어 스스로 ‘도서평론가’라 칭하며 책 읽고, 글 쓰는 재미로 살고 있다.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책과 더불어 배우며 살아가다》,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 《어느 게으름뱅이의 책읽기》 등을 펴냈다. 안양대학교 교양학부 강의교수로 읽기와 쓰기를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