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에게 기록과 소통과 소유의 욕구와 의지는 원천적인가 보다. 서양문명의 원류인 헤브라이즘이 태어난 이집트에서부터 연표(年表)를 따라 도서관과 책에 관련된 역사를 더듬어 본다. 판타스틱한 여정이 되시길!
문명이 발생하면서 생겨난 고대 왕국들. 아프리카 윗자락에서 태어나 화려한 유럽문화와 마주 보게 된 이집트문명, 유럽 아래 끝자락에서 서남아시아 역사의 연원이 된 메소포타미아 문명, 그사이에 지중해가 누워 있다. 지혜의 여신이 지중해를 날아 아프리카와 소아시아를 넘나들며 그리스를 만든다. 두루마리에서 코덱스로, 또 다시 마우스는 컴퓨터 두루마리를 오르내리고 날아 다닌다.
고대 그리스 도서관문화의 신호탄이 된 인물들
땅에 뿌리내리고 자라나던 문화들이 왕조의 이름으로 경계를 만들고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다. 비너스의 몸만큼이나 풍만하고 신전의 기둥들만큼이나 든든한 고대 그리스! 그 언저리에서 만나는 책과 도서관 이야기 또한 환상적이다. BC 5세기에 만들어진 호메로스의 『일리어스』 (Ilias)와 『오디세이아』(Odyssey) 같은 희곡들이 음유시인들의 목소리로 낭독되고, 이 희곡 필사본이 학교에서 읽기 교재로 사용되던 시대가, 그리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학문의 열정이 서구문화의 뿌리가 되었다.
고대 그리스에서 책 수집에 열광하여 도서관문화의 신호탄이 된 인물들은 참 다양하다. 첫행보의 주역들은 ‘피의 법’으로 알려진 『드라콘법』의 저자 드라콘/Drakon(BC 7C), 해적 행위로 책을 수집한 폴리크라테스/Polykrates(BC 6C), 우아한 현인 솔론/Solln(BC 6C), 쿠데타로 권력을 쥔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os(BC 6C)를 들 수 있는데, 그들의 책과 수집에 대한 태도는 각각 전혀 다르지만 그리스 도서관문화의 출발이 되었다. 요즈음의 도서관에 대한 각계각층의 많은 관심 또한 조금은 다르게도 보인다.
플라톤(BC 4C)과 아리스토텔레스(BC 3C) 시대에 오면서 학교가 생기고 개인공공도서관이 생겨나는 것뿐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와 테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의 문고를 사기도 하고, 탐나는 책은 훔치기까지 하던 부자 아펠리콘/Apellicon(BC 1C) 또한 등장한다. 낙장(落張. 책의 빠진 장)을 보아 넘기지 못하는 지나친 탐심은 오류가 많은 책을 생산하면서도 희귀본을 남겨주기도 하니 역사는 재미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도서관의 핵심적 기능과 관계 있는 것은 희소성 있는 필사본 보관소를 지정한 아테네 정부의 칙령과 종교적 축제로 국가 후원하에 거행되던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유리피데스 연극의 원문 보관의 필요성이 제기된 점이라할 수 있다.
도서관 역사에 큰 족적 남긴 포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몇몇 지역에서 왕조가 탄생했다. 그중에 알렉산 드리아를 수도로 삼고 이집트를 다스렸던 포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로마에 정복당하기까지 300년 남짓 존속되었지만 도서관 역사에서는 큰 족적을 남겼다. 우리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라 부른다. 포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기 왕들은 지식인들이었다. 신흥도시 알렉산드리 아에 뮤세이온(Museion:연구소 개념)을 만들어 아테네의 유명학자들을 초대하였으며 도서관은 이들의 연구를 돕는 기능을 하도록 했다. 열정적인 왕들만큼이나 도서관 관장들 또한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졌으며 도서관 업무에서도 특별한 업적을 보여준다. 초대관장인 제로투스가 시행한 자료의 분류와 알파벳 순의 조직화는 그후의 도서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특별한 열정으로 거의 모든 자료들의 서가 위치를 기억했으며, 이런 아리스토파네스를 탐내는 페르가몬 도서관에 맞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그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다. 또 칼리마코스(BC 3C) 는 『목록』(pinakes)을 만들어, 도서관 역사에 획기적 기념비를 세웠다. 『목록』은 그리스 기록물을 세밀하게 고찰한 서지학적 연구였으며, 분량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보다 다섯 배 가량 많았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수서정책은 열정적이어서 12년도 되기 전에 20만 권의 파피루스 두루 마리를 구축했으며 가장 많은 때는 장서 수가 70만 권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호메로스 작품들과 파라오들의 연대기, 70인역 성서 등 거대한 장서 축적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학문의 중심 으로 만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도서관 열정이 없던 후기 포톨레마이오스 왕들은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로마에 복속되어 그 문이 언제 닫혀졌는 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의 이설(BC 48년, AD 640년)이 존재한다.
책 형태의 획기적 발전 이룬 페르가몬 도서관
또 소아시아에 자리를 잡고 150년간 지속된 페르가몬에도 도서관 이야기가 풍성하다. 특별한 술책으로 많은 부를 축적하여 페르가몬의 지도자가 된 아탈루스 1세(BC 296-197년)는 그림과 조각등 예술뿐 아니라, 책과 도서관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보다 늦게 출발한 것에 대한 초조감으로 에우메네스 2세(Eumenes II, BC 197-159)는 책 수집에 열중하여 20만 권의 책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이집트의 ‘파피루스 수출금지’는 페르가몬에 새로운 지혜를 주었다.
즉 양피지를 서사 재료로 쓰기 시작하면서, 책의 형태가 획기적으로 변하는 계기를 맞은 것은 페르가몬 도서관의 역사적 가치를 두드러지게 한다.
책이 두루마리(Volumen)에서 코덱스(Codex) 형태로의 발전은 의미가 크다. 코덱스는 네모 반듯하게 잘라 끝으로 묶은 책의 형태로 두루마리에 비해 정보 검색과 인용에 절대적이다. 이런 코덱스의 장점이 양피지로 하여금 파피루스를 몰아내게 했다. 페르가몬 도서관의 20만 권의 자료들 또한 로마의 장군 안토니우스의 손에 의해 클레오파트라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한다. 아마 그것이 70만 권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장서 구축에 일조를 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다시 마우스로 TV 화면의 두루마리를 만지작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