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이드솔루션(ID solution)이란 곳에서 ‘책 취향 테스트’를 내놓아 인기를 끌었다. 지중해, 몬순, 서안 해양성, 열대우림, 사막, 툰드라, 사바나, 북방침엽수립 8가지로 나눈 테스트 결과가 독특하고 재미있기 때문이다. 여느 심리 테스트처럼 심심풀이 삼아 해보았는데, ‘사막’과 ‘사바나’를 왔다갔다 했다. 난 건조한 인간이었던가? 갸우뚱.
그나마 하드보일드 실용주의란 부제를 단 ‘사막’ 독서 취향이 비슷한 것 같아 확정하려는데 설명의 한 대목이 눈에 거슬렸다. 바로 “인물 평전 같은 건조한 사실 기반 내용을 좋아하는 편”이란 말이다. 아니! 인물 평전이 건조하다니! 사실 기반은 옳은 말이지만, 건조 하다는 것에는 동의할 수가 없다. 인물 평전은 여느 소설보다도 드라마틱하고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득 들어 있는 책이다. 괜히 “사람의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인물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온갖 시대적 상황과 사람들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렇게 복원된 이야기를 ‘건조한 사막’으로 보는 것은 겉만 훑은 것이다. 그 속에 숨은 진정한 재미와 내용은 놓친 것이다.
역사서이자 인물 평전이라고 할 수 있는 《사기》나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같은 책들이 천년을 넘어 고전으로 자리매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어쩌면 이건 나만의 생각일지 모른다.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인물 평전들이 절판되고 도서관 서가에 꽁꽁 묶여 있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관심 멀어진 인물 책들 “건조하다고? 재미없다고?”
절판, 품절돼 도서관 서가 한켠에 처박혀 있지만…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에 일찍이 주목했던 사람은 철학자이자 우리나라 제일의 인물 책 수집 가이기도 했던 민병산 선생이다. 그는 신구문화사에서 《세계의 인간상》(전12권, 1962)을 기획, 출판하면서부터 인물 책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을 시작하였다. 역사를 산 사람들과 책을 통한 사귐이 무엇보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인간상》은 인물에 대한 변변한 책이 없던 시절 큰 성공을 거두었고, 이후 《한국의 인간상》(전6권, 1965)으로까지 발전되어 한국 출판사에 큰 획을 그었다. 비록 세로쓰기에 오래된 책이라 이제는 도서관 서가 한켠에 먼지로 덮여 있지만, 우리가 기억해 둬야 할 책들이다. 민병산 선생은 이후에도 꾸준히 인물 책에 관심을 가졌으며 말년에는 수문출판사에서 《세계전기문학전집》 100권을 기획, 진행하다 지병인 천식으로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한국의 인간상》과 《세계의 인간상》 이후에 인물 책을 대표할 만한 책은 실천문학사의 ‘역 사인물찾기’ 시리즈이다. 이 시리즈는 꾸준한 역사 속 인물 발굴과 《닥터 노먼 베쑨》, 《체 게바라 평전》 등의 스테디셀러 배출 등으로 인물 평전의 모범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인기를 얻지 못한 초기의 몇 권은 더 이상 서점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가장 안타까운 책은 항일 혁명가이자 중국 조선족자치주 창립을 주도한 지도자를 그려낸 《주덕해》와 1930년대 상해 에서 ‘영화황제’라는 칭호를 받으며 중국 영화사에서 가장 뛰어난 영화인 100명에 꼽히는 김엽의 일생을 다룬 《상해의 조선인 영화황제》이다.
또 주목할 만한 책은 미다스북스에서 출간되었던 ‘미다스 휴먼북스’ 시리즈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더욱 안타깝게도 모두 절판 또는 품절되었다. 도로시 허먼의 《헬렌 켈러》로 시작한 휴먼북스 시리즈는 《박정희 할머니의 나의 수채화 인생》까지 총 15권의 인물을 소개하고 짧은 삶을 마감했다. 이 시리즈는 의미 있는 평전을 여럿 내놓았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 가운데 《공자 평전》, 《노자 평전》, 《맹자 평전》, 《장자 평전》은 동양의 대사상가들의 참모습을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되는 책들이다.
언론의 독립성이 훼손된 요즈음 특히 생각나는 사람
무엇보다 휴먼북스 시리즈 중 가장 안타까운 책은 세계적인 사상사가이자 전기작가인 이샤야 벌린의 《칼 마르크스》이다. 1982년 평민사에서 해적판으로 번역되어 떠돌던 것을 미다스북스에서 정식 계약을 맺고 다시 번역하여 낸 이 책은 마르크스에 대한 최고의 평전으로 꼽힌다. 이 책이 절판된 것은 우리 출판문화계의 큰 아픔이 아닐수 없다. 마르크스를 이야기하다보니 떠오르는 책이 또 하나 있다. 1988년 지평출판 사에서 출판된 《자본론 이야기-마르크스 전기와 자본론 해설》이 바로 그것이다. 23 명의 일본인 학자들이 쓴 이 책은 마르크스라는 인물과 사상의 전체상을 자본론을 중심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마르크스의 생애를 다룬 다른 책들에서는 볼 수 없는 구체 적인 일화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일본다운 꼼꼼함과 폭넓은 출판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마지막으로 꼭 소개하고픈 평전은 원희복 기자가 쓴 《조용수 평전》과 《조용수와 민족일보》이다. 조용수는 4.19 혁명의 힘을 얻어 민중을 대변하고자 창간한 민족일보 사장이자 언론인이었다. 그러나 5.16 쿠데타가 일어나자 반국가적, 반혁명적이라는 이유로 민족일보는 3개월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고, 조용수 역시 사형을 선고받고 32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 억울한 사건은 사람들에게서 잊혔으나, 1994년 《조용수 평전》이 나온 뒤 널리 알려졌으며, 2004년 증보판인 《조용수와 민족일보》로 다시금 주목을 받았다. 결국 2008년 재심을 통해 조용수는 무죄 판결을 받았으며, 2009년 유가족들은 국가로부터 99억원 배상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진실은 밝혀졌지만, 책은 다시금 잊혀졌다. 언론의 독립성이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는 요즈음 잊혀진 《조용수 평전》을 도서관을 통해서라도 읽어보았으면 한다.
※ 여기에 소개된 책은 국가상호대차서비스 책바다(http://www.nl.go.kr/nill)를 통해 소장 공공도서관을 확인할 수 있으며, 상호대차 신청을 통해 가까운 공공도서관에서 받아 볼 수 있다. 검색되지 않는 공공도서관들도 많으니 참고하길 바란다. 대학이나 연구소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다면, 학술연구정보서비스(http://www.riss.kr)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